넷플릭스 스포츠 다큐 ‘대역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언더독’이었습니다. ‘악의 제국(Evil’s Empire)’이라 불렸던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챔피언십 시리즈를 역스윕하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냈습니다.

2025년 현재 누구도 양키스를 ‘악의 제국’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양키스 앞에 더 이상 ‘언더독’이란 평가를 받지 않죠.
이번 시즌 레드삭스는 양키스를 상대로 7승 1패를 기록중입니다. 양키스는 올해 초 레드삭스에게 첫 게임을 승리한 것을 빼곤 7연패를 내리 달리는 중이죠.
현재 아메리칸 리그 동부지구 2, 3위 자리를 다투는 레드삭스와 양키스는 금요일부터 4연전 시리즈를 치르는 중입니다. 어쩌면 시즌 후반 두 팀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시리즈가 되겠죠.

양키스타디움에서 22일 치러진 시리즈 첫 게임에서 레드삭스는 6-3으로 승리했고, 23일에도 1-0으로 이겼습니다. 레드삭스의 루키이자 미래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로만 앤서니(Roman Anthony, 최근 보스턴 지역 매체들은 앤서니의 이름을 본따 Roman Empire라는 말을 종종 씁니다. 악의 제국이었던 양키스를 조롱할 때도 쓰죠)는 양키스타디움 데뷔전이었던 22일 9회초, 쐐기 2점홈런을 쳤죠. 이 때 배트를 무심하게 던져버린 ‘배트 플립’은 이날 게임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입니다. ‘표현이 너무 거칠다’고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치만 실제 그렇습니다. 이 둘은 과거 우리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와 롯데 자이언츠의 관계를 훨씬 뛰어넘는 다른 차원의 영역입니다.
몇 가지 사건을 기억해 볼까요. 글 첫머리에 소개한 ‘대역전’이런 프로그램에도 자세히 소개된 사건입니다. 2003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당시 72세였던 양키스의 벤치코치 돈 짐머가 야구장에서 들 것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두 팀간 벌어진 벤치클리어링 과정에서 레드삭스의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짐머 코치를 강하게 밀쳐내면서 쓰러뜨렸죠. 70대 노인은 뒤로 나자빠져 뒹굴었고 바로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양키스 선수들은 펜웨이파크 직원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형사 기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롯데의 선수 누군가가 김응용 감독을 밀어내 병원에 후송시켰단 걸 상상할 수 있으세요? 선수끼리 저 정도 갈등이라면 야구장 바깥에서 팬들은 오죽할까요. 실제로 레드삭스의 한 팬은 양키스타디움에서 살해 위협을 받기도 했습니다.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그런 관계입니다.
양키스는 지난 15년간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팀은 리그에서 누구에게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특히 레드삭스에겐 더욱 그래요.

시즌 초반 양키스는 순항했습니다. 적어도 6월 초까지는요. 그들에게 시련이 닥쳐온 건 6월 13일부터입니다. 펜웨이파크에서 레드삭스와의 시리즈를 시작할 때 부터였습니다. 이 때 양키스는 42승 25패로 위닝 마치를 이어오면서 디비전 1위에 올라있었습니다. 레드삭스와는 9.5게임차나 벌어진 상태였죠. 이 시리즈에서 양키스는 스윕패를 당했고 그 때부터 내리막을 걷습니다. 그리고 레드삭스는 23일 현재, 양키스를 반 게임 앞선 디비전 2위입니다.
양키스는 브롱크스(홈)에서 열린 이번 시리즈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늦여름의 서늘한 기운이 돌기 시작한 양키스타디움은 시리즈 첫날부터 만원 관중이 들어 찼고, 라이벌 구도가 더해진 두 팀의 대결은 마치 포스트시즌을 방불케 했습니다. 엄숙한 분위기가 야구장을 휘감았고, 팬들은 공 하나 하나에 집중했습니다. 양키스는 ‘레드삭스 포비아’를 극복해야 한다는 미션이 있었죠. 그치만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고 공포증은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양키스는 레드삭스 팬들에게 조롱의 대상입니다. 어떤 선발투수가 마운드에 올라도 양키스는 승리하지 못하니까요. 또 앞선 상황에서 필승조 불펜투수들이 역전을 허용하고 게임을 내어줍니다. 이런 순간들이 반복될 때마다 레드삭스 팬들은 맥주 잔을 서로 부딪히며 왁자지껄하죠. “쟤넨 우리 밥이야.” 이 같은 말풍선은 양키 팬을 자극시키지만 정작 양키 선수들과 벤치는 전혀 대수롭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22일 여지없이 레드삭스에게 패한 날 밤, 양키스의 애런 분 감독은 “우리에게 좋은 밤은 아니었어요.”라는 얌전한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양키스 팬들이 기가 찰 만큼 아무렇지도 않게 이날의 패배를 받아들인 것 같았습니다.
2025년의 양키스-레드삭스 라이벌전이 과거만큼 강렬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의견들이 있어요. 사실 그렇기도 해요. 수십년전과 달리 선수들은 이제 대형 매니지먼트사의 입체적인 관리를 받는 하나의 초고가 히트상품입니다. 다쳐선 안되죠. 더이상 누군가 앞장서 쉽게 밀치는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구단 사장, 단장들이 프레스룸을 일부러 찾아 상대팀을 저주하고 모욕하는 인터뷰도 더 이상 하지 않죠.

그렇지만 이 두팀은 절대로 화목할 수 없습니다. 베이브 루스 때 부터 시작된 이 갈등 관계가 벌써 100여년이 됐죠. 이 세월이 흐른 동안 쌓인 갈등의 사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또 이 두팀의 불편한 관계는 메이저리그 자체에도 엄청난 흥행 자산입니다.
리그 사무국과 중계를 맡은 방송사(이번 시리즈 4경기에 중계 방송사가 3곳이나 붙었습니다. 두 경기는 전국중계로 진행할만큼 특별한 시리즈죠)들이 두 팀의 껄끄러운 관계에 서서히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두 팀 사이 연패 구간이 길어지자 브롱크스에 모인 뉴욕 홈팬들의 분노 표출 정도도 심해지고 있죠.

알렉스 코라 레드삭스 감독은 최근 3년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양키 팬들만큼이나 과격한 레드삭스 팬들 인내심도 바닥이 드러난 이번 시즌 드디어 그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기억하시죠? 레드삭스는 지난 6월 15일 라파엘 데버스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보냈습니다. 시즌을 일찌감치 정리하고 리툴링에 들어서려했죠. 하지만 그 때 양키스를 만나 시리즈를 삼켜내고 도약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도 벌써 2연승을 챙겼습니다. 가을야구 티켓도 거의 손에 쥐었죠. 레드삭스는 시즌을 정리하려던 때 양키스를 밟아 서며 다시 한 번 ‘대역전’의 시즌을 만드는 중입니다.

그래도 내일 양키스타디움에서 레드삭스 유니폼을 입고 맥주잔을 부딪히는 간 큰 팬들은 없겠죠. 두 팀 사이 과열 양상이 좀 식었다고 해도 팬들까지 덩달아 싱거워진 건 아니잖아요. 글 윗 부분에서 ‘살해 위협을 받았다’는 레드삭스 팬 이야기는 그 옛날 2000년대 초반이 아닌 올해 사건이었습니다. 남은 시리즈에서 이 두 팀이 만들어낼 이야기에 반전이 찾아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