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갈매기 김광현, 홍관조(cardinal) 되어 날아오르다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인천에 연고를 둔 SK와이번스를 대표하는 응원가 ‘연안부두’의 한 대목이다. 김 트리오가 부른 이 전통가요를 야구장에서 수 없이 듣던 김광현은 큰 꿈을 갖고 빅리그로 떠났다. 2020시즌 개막을 앞둔 ‘MLB 스프링 캠프’에서 김광현은 5경기(9이닝)에 등판해 무실점 완벽투를 보이며, 스프링 캠프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렇게 김광현의 큰 꿈이 실현되는 건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 코로나 사태가 가져다준 친구, 애덤 웨인라이트
3월 중순 정규 시즌 중에 확진자가 나온 NBA가 리그를 중단하자 MLB도 이내 스프링캠프 문을 닫았다. 당시 ‘4월 중순 개막, 늦어도 5월 중 개막’이란 보도가 떴지만, 우여곡절 끝에 7월이 되서야 겨우 시즌을 열었다. 약 3개월을 불확실한 미래만 바라보고 지낸 김광현에 대한 우울한 보도가 잇따랐다. 한국에 가족을 두고 온데다 선발, 구원 투수로의 보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기약 없는 개막 날만 기다리는 처지였다. 다행히도 카디널스에 ‘갈매기 우는 그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이 팀을 상징하는 에이스 스타 애덤 웨인라이트였다. 웨인라이트는 ‘먼 타지에서 누구보다 마음이 공허할 사람이 김광현 말고 누구겠나’라며 캐치볼 파트너부터 밥친구 그리고 야구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형님 노릇까지 자처하고 나섰다. 조직생활 해본 사람들은 알지 않나. 가장 선배격인 사람이 내 편이 되어줄 때의 안도감. 늦어진 개막으로 인해 김광현이 얻은 건 ‘인복(人福)’이 아니었을까.
▣ 위기 뒤의 기회 ! 카를로스 마르티네스의 이탈
노쇠화한 애덤라이트를 대신해 수년간 카디널스의 개막전 선발투수를 맡은 이는 C-Mart(카를로스 마르티네스의 애칭)였다. 그런 그가 부상을 이유로 작년 잠시 마무리투수로 보직 변경을 했었다. 이번 시즌이 열리기전 그는 공공연히 ‘선발투수로의 복귀’를 선언했고, 팀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나름대로 탄탄한 선발진을 구축한 카디널스의 라인업에 김광현이 이름을 올리긴 부담스런 상황이 됐다. 그렇게 김광현은 불펜에서 시즌을 출발했고, 빅리그 데뷔전 역시 팀의 클로저로 치렀다(흠뻑 혼쭐이 난 데뷔전이었지만). 하지만 시즌 중 마르티네스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으면서 김광현에게 기회가 왔다. 마르티네스가 빠진 선발 라인업에 김광현 이름이 올라갔다.
▣ KK(김광현 영문 이니셜 약자)! 빅리그 마운드에 우뚝 섰다
선발로의 보직 변경 결과는 대 성공이었다! 김광현은 선발로 나선 2경기서 9와 3분의 2이닝을 소화하며 방어율 0.93으로 SK의 에이스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줬다(2경기 1승). MLB닷컴은 그가 나선 두 번의 등판 이후 그를 리그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하는 신인 6위로 선정했다. 이제 더 이상 데뷔 날 보여준 넋 나간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마운드에서 여유를 찾은 김광현은 안타를 맞아도 특유의 옅은 미소를 보이는 여유까지 되찾았다.
▣ 이어지는 인복(人福), 야디에르 몰리나
류현진의 공을 받는 포수는 대니 잰슨(누군지 아시는 분이 별로 없을 듯)이다. 보더라인 피칭이 주무기인 류현진은 잰슨의 모자란 프레이밍으로 손해를 많이 보고 있다. 반면 김광현의 공은 야디에르 몰리나(Yadier Molina)가 받고 있다. 올스타 포수 3명이나 배출한 포수 명가 몰리나 가문에서도 가장 빛난 스타가 야디에르다. 그는 골든글러브만 9개를 수상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고의 포수 중 하나로 뽑힌다. 김광현의 주무기중 하나인 슬라이더는 땅바닥에 패대기치듯 들어오면서 자칫 폭투로 이어지기 쉽다. 하지만 김광현은 안심하고 마음껏 패대기질 해도 된다. 한 세기를 대표하는 레전드 포수가 커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데뷔전을 치른 9회에도 김광현이 흔들리자 몰리나는 웃는 얼굴로 마운드로 올라와 그의 어깨를 감쌌다. 컵스와 레즈를 상대로 선발투수가 됐을 때도 몰리나는 이닝을 마칠 때마다 김광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소 띈 얼굴로 뭔가를 계속 이야기했다(투구내용이나 자신감을 가지란 격려였을 것이다). 메이저리그 데뷔 무대를 치르는 수많은 투수 중에 몰리나에게 공을 던질 수 있는 특권을 누린 김광현은 그로인해 생각보다 빨리 빅리그 마운드를 장악하고 있다.
▣ 아직은 불안정한 입지
호투를 이어가고 있지만, 그가 붙박이 선발이란 보장은 아직이다. C-Mart가 코로나 완치 판정을 받고 선발로의 복귀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단에서도 이를 받아들일 모양새다. 이렇게 되면 김광현은 다시 불펜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히 안전한 적응을 마친 김광현은 이제 불펜으로 돌아가도 얼지 않고 던질 것이다. 최근 2경기서 보여준 그의 커맨드와 슬라이더 궤적이나 구속은 불규칙적인 루틴 속에서도 충분히 1~2이닝을 완벽히 소화해 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선발투수와 불펜투수는 마운드에 오를 루틴 자체가 다르다. 날짜를 정해놓고 등판을 준비하는 것과 매일 등판을 준비하는 건 애당초 다른 이야기다. 불안정한 입지가 길게 이어진다면 그의 투구에도 안 좋은 영향이 끼칠 수 있다.
카디널스는 명문구단이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팀이다. 김광현은 애덤 웨인라이트나 야디에르 몰리나와 같은 레전드급 선수들로부터 호감을 사며 팀과 리그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제 남은 건 그의 투구 역량으로 리그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하는 것뿐이다. 명문구단일수록 이 잣대는 더 냉정할 것이다. 김광현이 어디까지 비상할 수 있을지 팬으로서 지켜보자.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그의 높은 비상으로 '내년 시즌엔 김광현의 주장에 구단이 귀 기울지 않을까'라며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