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레전드 예능 진출의 명(明)과 암(暗)_feat. 이종범

KBL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선수는 아무래도 서장훈 선수일겁니다. 화려한 이력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그가 남긴 숱한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 농구 역사의 레전드로 기억될 그는 지도자, 리그 관계자 등 그 어떤 직책으로도 더 이상 코트에 서지 않습니다. 서장훈은 방송계 최고의 블루칩 중 하나가 됐습니다. 화려한 입담에 콕콕 꽂히는 쓴 소리 화법은 그의 전매특허죠.

‘먹방’이 유튜브 콘텐츠 대세로 자리 잡을 때 빠르게 구독자를 끌어 모은 이는 다름 아닌 또 다른 농구 선수출신 현주엽이었습니다. 그가 선택한 식당은 맛집 반열에 올랐습니다. 한 입에 깔끔하게 털어 먹으면서도 쩝쩝 소리 내지 않는 그의 먹방엔 호불호가 갈리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주엽은 휘문고 감독으로서 논란에 휩싸였고, 상당 시간 자숙기를 보내야만 했습니다. 최근 ‘먹방’ 콘텐츠로 다시 돌아온 그를 향한건 비난 보다 환영이 많아 보였습니다. 현주엽은 컴백의 현장을 코트가 아닌 유튜브 카메라로 선택했습니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를 한 자리서 모아볼 수 있는 콘텐츠가 있습니다. 한 시절 축구선수로 획을 그은 레전드들이 지도자가 되어 서로 간 축구 지략을 뜨겁게 펼쳐 보이는 이 방송은 ‘골때리는 그녀들’입니다. 여자 연예인들이 축구팀을 구성해 리그전을 펼치는 이 방송은 예능 프로그램 치곤 장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 방송 콘셉트는 시시콜콜 떠들거나 왁자지껄 유쾌한 설정은 거의 없습니다. 시종 진지하게 축구만을 바라봅니다. 이영표, 하석주, 김태영, 이을용 등 열거하자면 한 줄이 넘어갈 만큼 많은 왕년의 축구 스타들이 감독을 맡습니다. 엄숙하고 진심을 다해 감독직을 수행하는 이들 레전드들은 오늘도 필드가 아닌 예능 카메라 앞에 서 있습니다.

두산 베어스를 지난 3년간 이끈 이승엽 전 감독이 처음으로 야구 지휘봉을 잡은 팀은 ‘최강야구’팀이었습니다. 은퇴한 선수들을 주축으로 만든 예능 방송 야구팀이죠. 최강야구는 선수 유니폼을 벗은 이들이 아직 남아있는 열정을 불사르며 학원 야구의 중심에 선 미래의 프로선수들과 대결하는 구도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최근에는 제작비와 수익배분으로 인한 갈등으로 방송 플랫폼이 유튜브로 바뀌었고 프로그램이자 팀명도 ‘불꽃야구’로 바뀌었죠. 예능 야구팀을 이끌던 이승엽 전 감독은 별안간 두산 베어스의 부름을 받았고 하루아침에 프로야구팀 최고지도자가 됐습니다. 그 흔한 코치 경력도 거치지 않았죠.

며칠 전 이종범 KT위즈 코치가 ‘최강야구‘ 감독으로 확정됐단 소식이 뉴스사이트 스포츠 카테고리 뿐 아니라 연예 영역까지 뒤덮었습니다. 이승엽 전 감독과는 완전 반대 되는 상황으로, 현직 프로야구팀 1군 타격코치가 느닷없이 예능 야구팀의 감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최강야구는 불꽃야구와 논란이 붙은 JTBC가 방송을 준비중인 프로그램입니다. 이종범 최강야구팀 감독은 ‘바람의 아들’이라 불리며 우리 야구계에 큰 족적을 남긴 레전드입니다. 그의 아들 이정후 선수는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서 대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사위인 고우석 선수는 국가대표 마무리 투수였고 현재는 잠시 부침을 겪고 있지만 여전히 빅리거를 향한 여정에 올라 있습니다. 그야말로 야구 명문가라 할 수 있는 집안의 가장이죠.
이 감독은 2012년 기아 타이거즈에서 은퇴한 뒤 15년여 동안 코치생활을 이어왔습니다. 한화 이글스 주루코치를 시작으로 LG트윈스, 주니치 드래곤즈, 다시 LG, KT까지. 최원호, 이승엽, 이호준 등 이 감독과 비교해 코치 경력이 짧았거나 전혀 없던 후배들이 프로야구 감독직을 거쳤지만 그는 여전히 코치로 그라운드에서 선수들과 함께 뛰었습니다.

이대로면 영원히 감독자리에 오를 수 없을거란 조바심이 있었던걸까요. 이 감독은 시즌이 한창 진행중인 때 갑작스레 팀(KT)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알다시피 프로야구 순위 싸움은 여름에 판가름 납니다. KT는 40승 3무 37패로 리그 6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5위 SSG랜더스와는 승차 없이 승률이 같고 3위 롯데와는 3게임차에 불과해 가을야구는 물론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팀 입니다. 그런 팀의 1군 코치가 예능야구팀 감독으로 직업을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이종범의 이번 선택은 어떤 결말로 이어질까요. 그는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을까요. 최강야구 제작진도 고육지책으로 이종범 감독을 향해 손짓했을겁니다. 이 프로그램은 장시원 CP가 제작하는 불꽃야구와 본격적인 경쟁을 앞두고 있습니다.
불꽃야구(전 최강야구)와 같은 야구 예능은 앞서 언급한대로 야구계에 공헌한 순기능이 적지 않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고교, 대학야구 선수들은 야구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습니다. 독립리그에서 외롭게 훈련하던 이들의 가능성도 이 프로를 통해 확산했습니다. 독립리그에서 뛰던 황영묵(현 한화 이글스), 메이저 대학이 아닌 곳에서 대학 선수로 뛰던 정현수(현 롯데 자이언츠) 같은 선수는 불꽃야구가 탄생시킨 최고의 히트상품입니다. 이 같은 순기능 이면엔 약간의 아쉬운 지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평생을 농구로, 축구로, 야구로 살아온 이들의 또 다른 삶의 현장은 더 이상 운동장이 아닌 방송 세트장이 되어갑니다. 이 세트장이 실제론 운동장이니까 엄밀히 따지면 예능 방송을 위해 마련된 운동장이겠네요. 선수시절 레전드로 팬들의 사랑을 받은 이들이 선택한 제2의 인생 행로가 코트나, 필드, 스타디움이 아니란 점이 다소 아쉽게 느껴집니다. 물론 스포츠를 접목한 예능방송 인기몰이가 해당 종목의 부흥과 확산에 도움이 될테죠. 시청자들의 눈 요깃거리로도 충분하고요. 그렇지만 특정 종목을 대표하는 레전드가 뿌리 단단한 선배, 지도자, 멘토로 오래도록 자리잡는 것 또한 필요하지 않을까요.
언제부턴가 정통 스포츠가 예능프로그램의 영역으로 확산했습니다. 반대로 예능의 영역이 스포츠 인기 확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스포츠와 예능콘텐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습니다. 뚜렷한 장점은 잘 유지되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경계선도 필요합니다. 승리와 우승을 향한 숭고한 도전의 현장은 즐거움과 볼거리로 가득 채운 시청률 경쟁의 영역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방송 카메라 앞을 채우는 왕년의 스타들 만큼이나 필드와 코트를 지키는 고참, 선배 선수들도 많아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