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위대한 패배자,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Vladimir Guerrero Jr.)
블라디미르 게레로 Jr. 도미니카생이지만 캐나다 퀘벡에서 성장기를 보낸 그는 이번 포스트시즌을 통해 캐나다의 스포츠 영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포스트시즌의 괴물과 같은 활약을 통해 드디어 완성형 선수가 된 그는, 과연 14년 장기계약을 안긴 팀에게 조만간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안길 수 있을까요.
2002년 메이저리그 정규 시즌 마지막 날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날 캐나다 퀘백 주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홈구장 ‘올림픽 스타디움’을 수만 관중이 채웠습니다. 소속 팀의 스타 플레이어인 블라디미르 게레로의 40홈런-40도루 대기록의 순간을 생생히 지켜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게레로는 그 전 게임에서 이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펜스 우측 상단을 때린 타구가 홈런이 아닌 2루타로 판정(당시 오심 논란이 있었음)을 받으면서 아쉬움을 삼켰습니다. 정규 시즌 마지막 타석에 들어선 게레로는 기록을 의식하면서 홈런 스윙을 이어갑니다. 그 큰 스윙궤적에 공이 들어맞기만 하면 구장 어느곳이라도 넘어갈 만한 해 보였죠. 하지만 게레로는 치지 말아야 할 공은 선택했고 체크스윙(이것 역시 오심 논란이 있었음) 판정을 받아 삼진으로 시즌을 끝냈습니다. 큰 기록을 성취하지 못했죠. 마지막 수비를 위해 외야로 뛰어갈 때 캐나다 몬트리올의 모든 팬들이 기립박수로 게레로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큰 덩치의 게레로 옆에 한 꼬마아기가 엑스포스 유니폼을 갖춰 입고는 같이 뛰어가고 있었죠. 아버지가 모자를 벗어 관중들에게 인사하자 이제 막 세살이 지난 어린꼬마도 헬멧을 벗고 손인사를 건넸습니다. 블라디미르 게레로 주니어(이하 ‘블라디’로 쓰겠습니다. 블라디는 게레로 주니어의 별명입니다)가 캐나다 야구 팬들과 처음으로 교감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2025년 월드시리즈 7차전이 열리던 날 밤, 블라디는 캐나다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주장 마리-필립 풀랑(Marie-Phillip Poulin)의 저지를 입고 경기장에 출근했습니다. 풀랑은 캐나다의 스포츠 영웅입니다. ‘캡틴 클러치’로 불리는 그녀는 세 번의 올림픽 결승전에서 금메달 결승득점을 올린 선수입니다. 블라디가 이 저지를 입고 경기장으로 나선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경기장에 모인 모든 팬, TV를 지켜보는 시청자들에게 캐나다 야구의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블라디는 캐나다 야구의 심장이 됐습니다.
이번 시즌이 개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블라디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14년 5억달러(약 6900억원) 규모의 연장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블루제이스는 이 계약을 반드시 후회할지 모른다”는 머릿기사 뉴스들이 떠돌았고, 심지어 구단의 직원과 임원까지도 이 계약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어쩌면 당시 그런 의심은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좋은 기업이라면 신중한 투자가 철칙이고, 블라디와의 계약처럼 한 선수와 14년의 동행을 이어가는 장기계약에는 수많은 변수와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 계약을 맺고 아직 채 1년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블라디와의 장기 계약에 딴죽을 거는 시선은 없을겁니다. 블라디는 계약 첫 시즌만에 그만한 가치평가를 이어가고 있으니까요.

그가 이끄는 블루제이스는 1993년 이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무대에 나섰습니다. 양키스를 상대로 디비전시리즈에서 승리하고 시애틀 매리너스와 최종전까지 치러야했던 챔피언십시리즈를 지나오면서 캐나다 온 국토가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이번 월드시리즈 7차전을 지켜본 시청자 수는 2017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7차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월드시리즈를 맞이 할 때 오타니 쇼헤이와 블라디는 타격 퍼포먼스를 두고 줄곧 비교됐습니다. 그 때 게레로의 포스트시즌 타율은 .462, OPS는 1.532에 달했습니다. 반면 오타니의 타율은 .250이 채 되지 않았죠. 이런 비교군 하나만으로도 캐나다 야구팬들은 큰 희망을 걸었습니다. 팀 동료 크리스 배싯은 이렇게 말합니다. “블라디의 계약은 우리 팀 모든 걸 안정시킨 겁니다. 그 때부터 우리팀 분위기가 바뀌었고, 비전을 강력하게 세울 수 있었죠. 그러니까 구단의 미래를 바로잡은 그런 계약이었던 겁니다.”
블라디가 포스트시즌에서 홈런을 치고 타점을 기록하면서 팀이 월드시리즈에 한발자국씩 가까워질 때 마다 캐나다 방송은 호세 바티스타와 조 카터의 하이라이트 영상을 잇따라 틀었습니다. 과거의 영광스런운 장면들이 현재와 교차하면서 캐나다 국민들이 하나로 뭉쳐갔고, 온타리오 주 전체가 10월의 광란을 보낸겁니다. 이 모든 걸 금전적 가치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로스 앳킨스(Ross Atkins) 블루제이스 단장의 말입니다. “5억달러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블라디와 계약을 맺기 전까지 우리는 디비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죠. 슈퍼스타를 이 도시의 영원한 플레이어로 자리잡게 한 것은 정말 긍정적인 일이었습니다. 선수 본인에게도, 팀 분위기에도 말이죠.”

블루제이스는 정말 오래 전부터 팀의 ‘얼굴’이 될 만한 재목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던 2015년 7월, 팀은 블라디와 주니어 계약을 맺었죠. 당시 16세에 불과한 소년에게 400만달러 가까운 돈을 투자했습니다. 규정상 허용된 국제 계약 한도를 넘어설 정도였죠. 추가 계약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팀은 당시 유망주였던 선수 두 명이나 다저스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키워 올린 블라디는 빅리그에 데뷔하고 5시즌 연속 올스타에 뽑혔습니다. 이 기간 1루수 플레이어들 중, 조정득점생산력(wRC+)에서 블라디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한 선수는 브라이스 하퍼와 프레디 프리먼 뿐입니다. 하지만 블라디는 이제 전성기 구간에 들어서는 선수고 앞선 두 명은 커리어 황혼기를 향하고 있죠.
블라디의 존재감이 타석에서 또는 1루수 포지션에서만 높은 가치 평가를 받는 건 아닙니다. 팀에는 여전히 여러 고참 선수가 있지만 동료들은 하나같이 블라디를 팀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죠. 즉, 그의 리더십 또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기억하시죠. 블루제이스의 시즌 팀 불펜 방어율이 얼마나 처참했었는지요. 8월을 다 보낼 때쯤 블루제이스 팀 불펜 방어율은 5.04로 리그 최하위권으로 쳐져 있었습니다. 볼넷 비율도 그랬고요. 블론세이브로 승리를 날려버린 날도 적지 않았습니다. 블루제이스는 디비전 1위를 향하고 있었지만 불안한 불펜의 퍼포먼스가 늘 도마위에 올랐습니다. 9월 주말 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루어스를 상대할 때 였습니다. 팀의 클로저 제프 호프먼이 마운드로 향했습니다. 워밍업을 하면서 연습구 1개를 던졌을 때 갑자기 블라디가 뚜벅뚜벅 호프먼 곁으로 걸어왔습니다. 이건 정말 이례적인 장면이죠. 야수가 워밍업을 하고 있는 마무리 투수에게 다가가는 건 자칫 투수의 집중력을 끊어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장면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는 짧게 한마디 메시지를 말했습니다. “이 공을 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잖아. 누가 뭐래도 제프, 네가 우리팀의 마무리 투수야.” 시즌 내내 부침을 겪고 있던 호프먼에게 이 순간은 반전의 모멘텀이 만들어진 때가 됐습니다. 존 슈나이더 감독이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블라디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과 말에 무게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뭘 하든, 어찌하든, 말 하나 단어 하나하나에도 영향력이 있습니다. 지금 팀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동료들이 어떤 기분인지를 이해하고 있죠.”
이날 호프먼은 9회 무실점으로 틀어막았고, 리그 최고 승률팀 브루어스를 상대로 승리했습니다. 블라디의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고 팀의 중심선수로서의 묵직한 울림이 된거죠.
이처럼 블라디의 존재감은 경기장 뿐 아니라 더그아웃, 라커룸에서까지 동료들에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그의 영향력을 모두 인정하고 팀을 하나로 묶어내는 마법 같은 힘을 지니고 있죠. 이 모든 게 5억달러 계약이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고요.
블라디는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15타수를 맞이할 때까지 9안타에 6개의 홈런을 쳤습니다. 홈런을 쳐낸 구종은 이랬습니다. 체인지업 2개, 포심과 슬라이더, 싱커, 커브가 각각 1개씩. 즉 모든 구종을 가리지 않고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타격 매커니즘이 완성된거죠. 블라디는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 시리즈에서만 4경기 17타수 9안타를 쳤습니다. 타율이 .529, 홈런 3개, 9타점을 올렸죠(2차전에선 만루홈런까지). 누구도 포스트시즌에서 양키스라는 무게감 있는 팀을 상대로 이와 같은 퍼포먼스를 쓰긴 쉽지 않습니다. 이를 두고 블라디와 친분이 깊은 시애틀 매리너스의 훌리오 로드리게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포스트시즌을 통해 그는 완성형 선수가 됐다.”

훌리오의 표현에 동의합니다. 블라디는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올리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양키스, 매리너스, 다저스를 상대하면서 블루제이스가 이 시대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야구팀 중에 하나란 것을 분명하게 증명시켰습니다. 도미니카에서 태어났지만 캐나다 퀘백에서 성장기를 보낸 블라디는 이번 포스트시즌을 계기로 캐나다 스포츠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시리즈의 끄트머리 순간이었던 7차전 연장 11회말, 블라디는 2루타를 치고 베이스 위에서 우렁찬 포효로 로저스 센터를 들끓게 했습니다. 그 장면을 끝으로 캐나다 야구의 한 시즌도 막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그의 야구 서사는 이제 첫 머리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비록 이번에는 ‘위대한 패배자’로 남았지만 그는 새로운 챕터에서 또다른 캐나다 야구의 역사를 써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몬트리올에서 우승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저는 꼭 토론토에서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고 싶습니다.”
그의 순수한 꿈이 이뤄지길 응원합니다. 아마도 그 꿈의 가치는 5억달러를 훨씬 상회할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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