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펜, ‘품격’있는 승리의 비결

소방수. 경기 후반 승리를 지키는 투수를 상징하는 우리식 표현이다.
1985년부터 2000년까지 한국프로야구 MBC청룡과 LG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16년간 227세이브를 기록한 김용수는 ‘소방수’란 별명을 가진 국내 첫 마무리 투수였다.
그가 등판하면 트윈스는 기분 좋게 경기를 마무리 했다. 김용수가 남긴 통산 세이브 숫자가 증거다. 야구를 잘 몰랐던 어린시절에 본 김용수에 대한 임팩트는 크게 남지 않았다. 몇 개의 공을 던지고 나면 세이브 숫자가 올라가니까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김용수의 통산 방어율 2.98이 말하듯, 세이브를 기록하는 순간 그는 많이 맞지도 않았다.
소방수 즉 마무리 투수는 대개 9회 1이닝을 책임진다. 접전에서 등판한 마무리 투수는 쇼타임의 주인공이다.
2015년 10월 22일 신시내티 레즈와 마이애미 말린스 경기의 9회초. 5-2로 레즈가 앞섰지만 무사만루의 위기가 찾아왔다. 이 때 등판한 레즈의 마무리 투수는 아롤디스 채프먼. 채프먼은 공 10개를 던져 세명의 삼진을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런 게 마무리 투수의 쇼타임이다. 강력한 소방수의 존재는 상대팀 승리 의지를 꺾는다. 2015시즌을 도약삼아 ‘전국구’ 마무리 투수가 된 채프먼은 리그를 대표하는 승리 보증수표다.
필승조. 이 말도 영어에 없는 우리 야구표현이다. 앞선 경기를 그대로 승리로 굳힐 때 등판하는 서너명의 불펜투수들이 필승조에 속한다.
223이닝 방어율 2.58. 2019년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받은 저스틴 벌랜더(Justin Verlander)가 남긴 성적이다.
539이닝 방어율 2.72. 벌랜더의 투구 이닝을 2배이상 던지고도 평균자책점은 비슷하다. 리그 사이영상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 이 지표는 2015년 시즌 캔자스시티 로열스 불펜 투수들이 거둔 성적이다.
1985년 이후 30년만에 리그 정상에 올라선 로열스가 2015월드시리즈에서 거둔 4승 중 3승은 불펜에서 나왔다. 로열스 불펜은 월드시리즈에서만 13이닝 연속 무자책을 기록했다.
‘루크 호체이버-켈빈 에레라-웨이드 데이비스’로 이어지는 황금 계투진은 2015 포스트시즌에서 35이닝을 던져 단 1점만 실점했다(방어율 0.26). ‘필승조’란 말이 참 잘 어울리는 계투진이다.
‘소방수’와 ‘필승조’는 완벽한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로열스의 월드시리즈 우승 이후 각 구단 불펜 투수들의 몸값은 치솟았다. 그야말로 불펜 야구 시대가 열렸다. 앤드류 밀러가 구원투수 연봉 1천만 달러 시대를 연 때도 이 시점이다. 2018시즌 탬파베이 레이스의 케빈 캐쉬 감독은 불펜 투수를 1회부터 올리는 파격 전술을 선보였다(물론 탬파의 선발투수진이 너무 좋지 않아 고육지책으로 나온 전략이지만). 비판과 의문이 무성한 캐쉬 감독의 전술은 리그 중반이 넘어서자 ‘오프너’란 말로 고급스럽게 포장됐다. 더 이상 불펜 투수들은 경기 중반에 나와 잠시 던지고 사라지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한 판의 야구에도 ‘품격’은 있다. 앞선 경기를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 짓는 경기 내용이 품격을 만든다. 역전에 역전은 분명 박진감을 더한다. 하지만 13대 12같은 스코어는 분명 수준 높은 야구경기라 말할 수 없다. 우승후보로 평가 받는 팀이 7점을 앞선 상황에서 ‘필승조’를 다 올리고도 동점을 내주고 상대 실책으로 ‘승리를 당한’ 경기라면 더 그렇다.
국내 야구 팬들 사이에 ‘어우두(어차피 우승은 두산)’란 말이 돌 만큼, 두산 베어스의 전력은 압도적이다. 배경엔 2019 시즌 방어율 3.64(리그 2위)를 기록한 불펜이 있었다. 베어스에는 이형범, 윤명준, 함덕주 등 KBO를 대표하는 젊은 불펜 투수들이 있다. 그러나 2020시즌 초반 베어스의 불펜은 ‘최악’이다. 17.2이닝 27안타 WHIP(1이닝당 출루허용)1.92 그리고 방어율은 9.17이다. 10일(일) 베어스는 KT위즈를 상대로 한 때 7점을 앞섰으나 결국 동점을 허용해 연장전을 치렀다. 베어스가 우승후보로 손 꼽히기에 예로 들었을 뿐, 다른 구단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SK와이번스의 김세현은 7일(목) 한화 이글스와의 1점차 접전 상황(2사 만루)에서 두 타자 연속 밀어내기 볼넷으로 2점을 헌납해 경기를 내주는데 기여(?)했다.
KBO리그는 이제 7회 이후 동전 뒤집기 같은 승부가 펼쳐지고 있다. 12일 현재 KBO불펜 평균 방어율은 5.77에 이른다. 불펜 투수들의 무차별 볼넷과 수 많은 피안타(홈런)로 ‘누가 더 점수를 많이 내느냐’에 승패가 갈린다.
경기 후반, 팬들의 손바닥에 흐르는 땀은 불펜 투수들과 타자들의 짱짱한 승부에서 비롯한다. 글 윗 부분에 말한것처럼 이제 불펜 투수들은 경기의 들러리가 아니다. 품격있는 승부를 결정짓는 승부사다. 그들의 실력이 곧 리그의 수준이 된다. 세계 야구계의 눈이 쏠린 KBO는 지금 일종의 ‘쇼케이스’를 진행중이다. 대한민국의 프로야구 경기가 야구종가 미국에 매일 생중계 되고 있다. 경기 직후 ESPN등 각종 스포츠 매체 사이트에는 그 날의 KBO경기 관람후기가 쏟아진다. 우려대로 많은 댓글 중 상당수는 불펜에 대한 내용이다. KBO는 세계 3대 프로야구 리그 중 하나로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미래 진출을 염두에 둘 만큼 권위 있는 리그다. 기왕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 거라면 KBO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면 좋겠다. 이제 그 키(Key)는 우리 불펜 투수들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