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일 낮 12시. 이 시간에 TV를 켜고 방송을 잔뜩 기대하는 시절은 아니지만 3월 8일은 달랐습니다. 지상파 어느 방송을 틀어도 야구 뿐이었습니다. 2026 WBC 대한민국과 대만의 경기가 펼쳐진 이 시간, 딱 한번의 필승을 염원하며 국민들이 TV 앞에 모였습니다. 밀라노 올림픽도 만들어내지 못한 국민 대통합의 순간을 야구가 만들고 있었습니다.
4-4로 9회까지 승부를 가르지 못하고 향한 연장 10회초. 어머니의 나라를 대표해 영광이라며 태극마크를 자랑스러워한 셰이 휘트컴 앞으로 번트 타구가 굴러갔습니다. 재빠르게 공을 낚아채 3루로 송구하던 그 순간 아나운서와 해설자 모두가 장탄식을 쏟아냈습니다. “아니..왜..” 이 경기 중계를 하던 모든 채널에서 반응이 같았습니다. 휘트컴의 송구는 반박자 늦었고, 대만 주자는 3루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주자가 이 경기의 결승 득점을 만들어냈습니다. 목놓아 ‘대한민국’ 나라이름을 외치는 스포츠 이벤트가 급격히 줄었지만 국민들은 이번만큼은 꼭 대만을 이겨주길 바랐습니다.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는 묘한 성격을 가진 국제 대회입니다. 이 대회는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메이저리그 선수노조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습니다. 국가대항전 성격의 메가톤급 이벤트지만 그 이면에는 상업논리가 짙게 깔려져 있습니다. 투수에겐 투구수 제한이 걸려있고, 연장전에선 승부치기로 승패가 갈립니다. 사무국의 입김에 따라 빅리그 슈퍼스타들이 자국을 대표해 뛰지만 구단과 에이전트에겐 출전 선수의 부상이 걱정거리가 됩니다. 선수 본인 조차도 시즌 스케쥴을 오히려 우려하면서 대표팀 출전을 꺼립니다. 월드컵이나 올림픽처럼 치열하게 총력을 다하는 국가 대항전은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면 대만전에 열중한 우리처럼 야구를 사랑하는 팬들이 야구장에 울려퍼지는 국가에 숙연해지고, 국기를 휘날리면서, 승리에 웃고 패배에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 대회 일본에게 패하면서 우승을 내준 미국은 와신상담하는 심정으로 이번 대표팀을 꾸렸습니다. 타릭 스쿠발과 폴 스킨스가 대표팀에 합류하면서 기대도 커졌습니다. 내셔널,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을 받은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팀USA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오른다는 그 자체만으로 미국민들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대회가 본격 열리기도 전에 스쿠발이 “저는 이번 대회에서 딱 한경기만 등판 할 것”이라는 인터뷰를 내놓으면서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습니다.

세계 최강의 좌완투수를 딱 한번 쓸 수 있는 미국은 그를 본선도 아닌 예선리그 그것도 야구 약체 영국과의 경기에 선발로 내세웠습니다. 아마도 스쿠발의 시즌 준비를 위한 일정 조율 때문에 등판 일정을 빠르게 잡았을겁니다. 스쿠발은 영국의 선두타자(네이트 이튼)에게 솔로 홈런을 내줬지만 이후에는 평소처럼 잘 던졌고 3이닝을 소화했습니다(3이닝 41구 피칭. 2피안타 1실점, 삼진 5개, 볼넷 0개). 미국이 영국에게 승리를 거둔 그 날밤, 스쿠발은 자신의 에이전트인 스캇 보라스에게 전화를 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통화 내용은 “지금 이 곳을 떠나기가 어렵습니다”였습니다. 스쿠발은 대표팀 클럽하우스에서 느낀 미묘한 감정에 이끌렸습니다. 그에 따르면 클럽하우스 안에는 USA를 대표한다는 애국심과 자부심이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저는 제 커리어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와 마주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스쿠발은 이번 시즌을 끝내면 FA신분을 획득하여 야구 역사상 가장 비싼 투수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에게 지금 이 순간은 부상을 당하지 않고 시즌을 완주해야 하는 본인과의 싸움을 시작하는 때 입니다. 그렇기에 대표팀에서 또 한번 마운드에 오르고 시즌을 시작하는 건 위험 변수를 키우는 일이 됩니다.
만약, 스쿠발이 한 경기를 더 던진다면 8강전, 준결승, 또는 결승전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쿠발 본인의 결정이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닙니다. 만약 대표팀에 남기로 결심을 굳힌다면 미국 대표팀이 그를 어떻게 활용할지도 불분명합니다. 아무튼 제 관점은 스쿠발의 결심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겁니다. 아무튼 스쿠발의 지금 마음은 4억달러의 계약을 위한 몸관리 보다는 미국을 대표한다는 애국심에 더 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은 대한민국과 난타전 끝에 승리한 다음날 호주를 상대로 낙승을 거둘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경기는 의외로 저득점 접전양상으로 흘렀고 0-1로 선취점을 내준 채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경우의 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대한민국 야구 팬들은 어느 새 일본의 역전을 바라며 응원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경기는 7회말까지 흘렀고, 일본은 1루에 주자를 내보냈지만 2아웃에 몰렸습니다. ‘8회를 기약해야 하는건가.’ 우리 야구팬들 침울함이 극에 달한 그 때 요시다 마사타카가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을 힘차게 퍼올렸습니다. 도쿄돔의 우측 관중석을 향해 비행한 그 공이 투런 홈런이 되자 일본 열도와 함께 우리도 방방 뛰었습니다.

지구에서 가장 비싼 야구선수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 중 한명인 후안 소토. 그도 도미니카 자국을 대표해 WBC를 뛰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올스타 레벨을 뛰어넘는 타선을 구성한 도미니카는 강력한 우승후보입니다. 소토는 예선 내내 이름 값에 걸맞는 활약을 펼쳐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소토 만큼 야구를 잘하는 동료들이 있었기에 도미니카의 본선행은 확실해졌습니다. 그들이 네덜란드를 상대로 펼친 9일 경기 중반까지 소토는 이렇다할 활약을 펼쳐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볼넷을 얻어 나간 소토가 2루로 전력 질주하며 도루를 합니다. ‘저러다 다치면 어떻게 하려고’라는 생각도 잠시 2루에서 세이프 된 소토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나도 나라를 위해 뭔가 했다구..”라는 말풍선이 그려졌습니다. 대회는 콜드게임 규정이 있습니다. 10점차 이상(7회 종료 순간 기준)으로 벌어지면 경기가 끝납니다. 도미니카의 7회말 공격 2사 1루 상황. 소토가 다시 타석에 들어섰고 그가 친 공이 2점 홈런이 되면서 경기는 콜드게임으로 끝났습니다. 소토가 홈런을 쳤을 때 마이애미 론디포 파크(경기장)를 만석으로 채운 도미니카 팬들은 마치 끝내기 홈런이 터진 것처럼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그 순간 그 곳은 ‘광란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를 도는 소토는 아주 큰 일을 치러낸 것처럼 뿌듯해 보였습니다.

상업적인 성격이 대회 근간에 깔려있지만 이번 WBC는 경기를 치를수록 알 수 없는 국가의 자존심이 더해지는 거 같습니다. 공 하나에 온 국민 탄식이 쏟아지고, 야구장을 가득 채운 팬들이 서로만이 알 수 있는 노래를 부르면서 응원을 펼칩니다. 수억 달러를 받는 슈퍼스타가 몸을 아끼지 않고, 저조한 활약에 속상해하며, 팀 승리에 공헌하면 어느 때 보다 자랑스러워 합니다. 어쩌면 올해 대회 본선 경쟁은 앞선 대회를 훌쩍 뛰어넘는 자존심 대결이 뜨거워질 거 같습니다. 세계인의 야구 축제로 분위기가 달아 올랐지만 연봉 총액 기준 세계 3위 규모를 자랑하는 우리는 강제로 시즌을 일찍 준비하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2실점 이하로 막으면서, 5점 차 이상의 스코어 차이로 호주를 상대로 승리해야만 ‘광란의 3월 야구’를 더 이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점째를 내주는 공 하나에 탄식이 쏟아질지도, 6점 차이로 벌리는 적시타에 환호가 터져나올지도 모릅니다. 야구는 언제나 그랬듯 예상을 뒤집는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까요. 기적 같은 결과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