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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맞대결이 열렸습니다.
일명 '장미 더비'. 경기장 안팎의 열기는 매서운 한겨울의 추위를 잊게 만들 만큼 뜨거웠죠. 하지만 3년 만에 열린 역사적 매치라는 타이틀에 비해 경기 내용은 너무나 지루했습니다. 결과 역시 1대 1 무승부였죠.
그래서 오늘은 경기 내용 리뷰보다는 프리미어리그 대표 더비 경기인 '장미 더비'에 대해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맨유와 리버풀의 노스웨스트 더비, 토트넘과 아스널의 북런던 더비, 뉴캐슬 유나이티드와 선덜랜드의 타인–위어 더비 등 수많은 라이벌 매치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역사와 감정의 깊이를 놓고 본다면, 맨유와 리즈의 '장미 더비'보다 오래되고 뿌리 깊은 앙숙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즈 유나이티드의 맞대결은 단순한 지역 더비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경기를 ‘장미 더비(Roses Derby)’라고 부르는 이유는, 축구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기원은 15세기 잉글랜드 전역을 뒤흔든 내전에 있습니다.

1455년부터 1487년까지, 잉글랜드에서는 왕위를 둘러싼 긴 내전이 이어졌습니다.
역사에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이 싸움은, 두 귀족 가문 간의 대립이었습니다.
북부 요크셔를 기반으로 한 요크가와 서부 랭커셔를 중심으로 한 랭커스터가가 왕권을 놓고 충돌했습니다.
요크가는 흰 장미를, 랭커스터가는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삼았습니다.
이 장미는 단순한 문양이 아니라, 지역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식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어느 가문, 어느 지역에 속해 있느냐는 정치적 선택을 넘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일이었습니다.
전쟁은 30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왕위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습니다.
귀족뿐 아니라 농민과 도시 시민들까지 휘말린 이 내전은 잉글랜드 사회 전반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결국 1485년 보즈워스 전투(Battle of Bosworth Field)에서 랭커스터가의 헨리 튜더(헨리 7세)가 승리하며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는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두 가문의 장미를 하나로 묶었고, 그렇게 튜더 왕조가 시작됐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화해였지만, 지역 간 감정의 골은 쉽게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요크셔와 랭커셔는 산업, 경제, 문화 전반에서 치열한 경쟁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맨체스터를 중심으로 한 랭커셔는 면직물 산업의 중심지로 급성장했고,
리즈를 포함한 요크셔 지역 역시 직물 산업을 기반으로 이에 맞섰습니다.
같은 산업, 같은 노동자 계층, 그러나 서로 다른 지역 정체성. 경쟁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해졌습니다.
이 오래된 대립이 축구라는 무대로 옮겨온 것이 바로 맨유와 리즈의 라이벌전입니다.

맨유는 랭커셔의 상징이고, 리즈는 요크셔의 자존심입니다.
두 팀의 경기는 단순히 승점 3점을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아닙니다.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노래와 구호, 서로를 향한 적대감 속에는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지역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경기는 지금도 ‘노스웨스트 더비’가 아닌 장미 더비로 불립니다.
붉은 장미와 흰 장미, 랭커셔와 요크셔.
두 가문의 역사는 책 속에 묻혔을지 모르지만, 축구장 안에서는 여전히 현재형으로 살아 있습니다.
엘런 로드든, 올드 트래포드든 이 두 팀이 마주하는 순간
그 경기는 언제나 단순한 축구 경기를 넘어선 의미를 갖습니다.

최근 몇 년간 리즈의 추락과 맨유의 압도적 경기력 우세로 인해 이 더비는 다소 관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맨유의 경기력이 예전 같지 않게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이 오래된 라이벌전 역시 다시금 긴장과 적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장미 더비는 그렇게, 언제든 다시 불붙을 준비가 된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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